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국 국회의사당 (문단 편집) === 파괴와 재건, 확장 === 비록 국회가 열리기는 했어도 아직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가운데 [[미영전쟁]]이 발발해 1814년 8월 24일 의사당 건물 일부가 불타는 피해를 입었다. 조지 뱀포드와 조셉 가드너 스위프트가 복구를 맡아 1815년부터 재건에 착수해 1819년에 끝났다. 이 과정에서 청동을 입힌 목조 [[돔]]이 1826년에 모습을 드러냈다. 첫 번째 돔은 [[판테온]]을 닮은 외관을 취하고 있었다. ||<:>[[파일:external/i.skyrock.net/3027866644_1_4_koAeKW23.jpg|width=500]] ||<:> [[파일:external/de.academic.ru/USCapitolDome_1859_Drawings.jpg|width=350]] || ||<:> 국회의사당 전경, 존 플럼브 촬영, [[1846년]]경 ||<:>국회의사당 돔 외부(왼쪽), 내부(오른쪽) || 이후 연방에 귀속된 주가 늘어남에 따라 1850년에 의사당을 대폭 확장했다. 건물이 커지면서 기존의 돔이 너무 낮고 왜소해 보이자 [[밀러드 필모어]] 대통령은 건축가 토머스 우스틱 발터(Thomas U. Walter, 1804.9.4.~1887.10.30.) 에게 새로운 돔을 의뢰했고 발터는 유럽 여행 때 자신이 봤던 프랑스의 [[앵발리드]], 영국의 [[세인트 폴 대성당]], 교황령의 [[성 베드로 대성당]]과 도면으로만 접한 러시아의 [[성 이사악 대성당]]의 돔을 참고해 직경 29m짜리 돔을 설계했다. 네 곳의 돔 모두 모두 전통적인 양식에 따라 기부와 두 개의 드럼, 둥근 지붕, 채광 정탑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성 이사악 대성당의 돔은 주철로 건설되었다. 발터는 국회의사당의 돔을 지을 재료로 성 이사악 대성당을 본떠 [[주철]]을 선택해 돌과 비슷한 질감 효과를 내면서도 내연성이 강하고 더 경제적인 재료를 골랐다. 발터의 돔은 외부의 주철 돔과 내부의 석조 돔으로 된 이중 구조이며, 돔 천장에 뚫린 채광 구멍을 통해 콘스탄티노 브루미디의 프레스코화 '워싱턴의 신격화'를 볼 수 있게 되어 있다. 돔은 1855년에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1861년 [[남북전쟁]]이 발발하면서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으나 국회의사당은 연방의 영속성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라는 판단에 따라 돔 공사를 재개한다는 결정이 1862년에 내려졌다. 1863년 12월 2일 [[자유의 여신상]]이 돔 꼭대기의 채광 정탑에 올려졌고, 1866년에 돔이 완공되었다. 공사에는 4천여 톤의 [[주철]]이 사용되었으며, 외벽은 흰색으로 칠해 석재 돔과 같은 질감을 나타냈다. [[에이브러햄 링컨]] 대통령이 암살당해 유해가 의사당 돔 지붕 아래 로툰다 홀에 안치됐을 때도 콘스탄티노 브루미디는 자신의 대작 '워싱턴의 신격화'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. 그런데 이번에는 완공된 새 돔이 기존의 의사당 열주랑을 압도했다. 이에 따라 1884년부터 1891년까지 대리석 테라스가, 1958년에는 동쪽 정면의 열주랑이 추가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. 로툰다에는 허레이쇼 그리노프(Horatio Greenough)가 [[올림피아]]의 [[제우스]] 신상을 본떠 조각한 [[http://upload.wikimedia.org/wikipedia/commons/thumb/d/d0/George_Washington_statue_1.jpg/576px-George_Washington_statue_1.jpg|조지 워싱턴의 좌상]]이 1843년에 설치되었으나 '벌거벗은 워싱턴이 옷을 찾기 위해 손을 하늘로 뻗었다'는 등의 조소를 듣는 등 설치 당시부터 많은 비판을 받은 끝에 [[1908년]] 스미소니언 협회로 옮겨졌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